‘난 이제 지쳤어요’, 클린 걸의 몰락이 말해주는 것

2026.06.11

‘난 이제 지쳤어요’, 클린 걸의 몰락이 말해주는 것

인정합시다. 우리는 지쳤습니다. 런웨이도 그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프라다와 시몬 로샤, 코치 최신 컬렉션에는 부스스한 머리카락과 짙은 다크서클, 어딘가 멍한 표정의 모델들이 등장했습니다. 내 침대든, 남의 침대든 방금 침대에서 일어난 사람들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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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온통 경계가 흐려진 상태입니다. 산업사회가 오랫동안 유지해온 ’지하철-직장-침대’의 질서는 사실상 무너졌습니다. 스마트폰은 손에서 떨어지지 않고, 일은 퇴근 후에도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무엇이 AI가 만든 것인지 구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휴식은 어디서든 취하거나, 아예 취하지 못하기도 하죠.

그래서 우리는 한동안 이 현실을 애써 부정했습니다. 이른바 ‘클린 걸’ 열풍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곱슬기 하나 없이 정돈된 머리카락, 모발 건강이 걱정될 만큼 팽팽하게 묶은 번 헤어, 공들인 티가 나지 않도록 더 많은 공을 들인 피부와 스타일링. 미니멀하지만 비싼 옷까지 더해져 ‘아무 걱정 없는 부자’의 이미지를 완성했습니다.

Phil Oh

하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지겨워졌습니다. 현실이 버거운 것과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다른 문제니까요. 다들 정신 없이 살아가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인터넷에서 말하는 ‘델루루(Delulu)’ 상태까지 가고 싶지는 않은 겁니다. 델루루는 ’망상(Delusional)’에서 파생된 슬랭으로, 현실이 뻔히 보이는데도 자신이 믿고 싶은 환상 속에 머무는 태도를 뜻합니다. 클린 룩이 약속하던 완벽하게 정돈된 삶 역시 이제는 그런 환상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죠.

Simone Rocha 2026 F/W RTW

Prada 2026 F/W RTW

Coach 2026 F/W RTW

너무 오랫동안 ‘잘하는 법’만 배워왔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뷰티 튜토리얼과 스킨케어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에, 이제 사람들은 오히려 ‘조금 망친 듯한’ 모습에서 새로움을 발견합니다. 옷은 약간 비뚤게 걸쳐 입고, 머리는 빗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흩날려야 하며, 메이크업은 살짝 번진 상태가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최소한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시대에는 말이죠.

요즘 패션은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글리 슈즈는 어느새 거의 모든 브랜드의 필수 품목이 됐고, 몇 달 전 저스틴 비버가 그래미 시상식 무대에 팬티 차림으로 기타를 들고 올랐을 때 많은 사람이 느낀 감정 역시 비슷합니다. 지금 우리를 끌어당기는 건 완벽함보다 무심함입니다. 애인의 옷장에서 빌려 입은 듯 헐렁한 셔츠, 막 걸친 듯 가벼운 옷차림, 심지어 트레이닝복까지 멋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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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가 한스 라구나(Hans Laguna)는 저서 <나인 채로의 나(Yo siendo yo)>에서 대중문화 산업이 요구하는 ‘가짜 자연스러움’을 이야기합니다. 자연스러워 보이기 위해 누구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아이러니 말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그 규칙을 따르기보다 비틀기 시작했습니다.

이 변화에는 정치적 맥락도 존재합니다. 여성과 LGBTIA+ 권리를 둘러싼 퇴행적 움직임이 이어지는 가운데, 일부 디자이너들은 ‘단정함’ 자체에 대해 다시 질문했습니다. 디자이너 딜라라 핀디코글루는 2023 봄/여름 컬렉션을 준비하며 “단정함은 나를 숨 막히게 만든다. 나는 그것을 싫어하고 부수고 싶다”라고 말했습니다.

@dilarafindikog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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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더 많은 브랜드와 사람들이 ‘워크 오브 셰임(Walk of Shame)’ 룩을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하룻밤을 보낸 뒤 전날 밤 옷차림 그대로, 번진 메이크업과 흐트러진 머리로 집에 돌아가는 모습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한때는 부끄러움의 상징이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Gucci 2026 F/W RTW

Gucci 2026 F/W RTW

오랫동안 여성들은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는 이유로 비난받아왔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패션은 한때 누군가가 던졌던 비난의 언어를 오히려 뒤집어쓰는 방식에 가깝습니다. 예전이라면 ‘단정하지 않다’라고 평가받았을 스타일을 일상복으로 선택하는 것이죠.

속옷이 보이냐, 마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을 누군가의 허락이나 판단의 대상으로 여기는 시선입니다. 클린 룩 이후의 패션이 말하는 것도 어쩌면 같은 이야기일지 모릅니다. 완벽하게 정돈된 사람처럼 보이는 것보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는 사실 말입니다.

하솔휘

하솔휘

웹 에디터

2025년 4월 <보그>에서 시작했습니다. 패션 감각이 필요한 모든 분야의 글을 씁니다. 많이 듣고, 다니고, 읽고, 고민하면서 제대로 된 글을 재밌게 쓸 줄 아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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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xandra Lores
사진
Getty Images, Phil oh, GoRunway, Instagram
출처
www.vogue.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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